"김포행 비행기가 돌연 北으로" 간첩 기습 공격...돌아오지 못한 11인[뉴스속오늘] - Supple

"김포행 비행기가 돌연 北으로" 간첩 기습 공격...돌아오지 못한 11인[뉴스속오늘]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피랍된 것과 동일 기종의 항공기/사진=뉴스11969년 12월 11일. 강릉을 출발해 김포로 향하던 대한항공 YS-11기가 돌연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향했다.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돼 북한으로 끌려간 것이었다.

조종사 위협한 북한 공작원 조창희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을 태운 YS-11기는 비행 도중 권총을 든 북한 공작원 조창희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다. 1960년대는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로 북한은 남한에 대한 무력시위 및 첩보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었다.

조창희는 강원 속초 출신 한국인으로 육군에 입대해 17년동안 복무했다. 이후 육군 헌병 준위로 제대했는데 제대 후 북과 접선해 한창기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간첩 활동을 해왔고, 북한 지령을 받아 항공기 납치 월북을 계획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창희는 제대 후 변변치 않은 생활로 인해 북에 포섭된 것으로 알려졌다.

권총을 소지한 채 비행기에 탑승한 조창희는 비행기 앞쪽 좌석에 앉아있다가 이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장실로 진입해 조종사를 권총으로 위협했고, 항로를 변경시켜 북한 함흥 인근 선덕 비행장에 강제 착륙시켰다.

당시에도 탑승 전 금속탐지기로 검사를 했지만 그때 금속탐지기는 성능이 뒤떨어지는 지뢰탐지기로 지뢰처럼 큰 물체만 탐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작은 권총은 탐지가 안됐기 때문에 항공 보안이 취약했던 것이다. 또 비행기 탑승 당시 조창희가 육군 준장 계급장을 단 제복을 입고 있어서 보안 검색 없이 VIP 대우를 받으며 탑승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송환자들의 공통된 증언에 따르면 조창희는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준비된 검은색 세단을 타고 떠났다고 한다. 귀빈 대접을 받은 셈이다.

북한은 조종사 2명이 스스로 항로를 바꿔 자진 입북했다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는 북한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채널이 없었고, UN과 국제적십자위원회에 협조를 요청했다. 북한은 "50명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당신들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을 내놨다. 가족들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1970년 새해가 밝았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11명…"한사람씩 없어졌다"

1970년 2월5일 북한은 납북자들을 송환하겠다고 공표했다. 그런데 50명 중 11명은 송환하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 정부는 전원 송환을 요구하며 협상을 벌였지만 같은해 2월14일 판문점을 통해 39명만 송환됐다. 북한에 억류된 지 66일 만이었다.

그렇게 사건은 종결됐고, 결국 유병하(기장·당시 36세), 최석만(부기장·당시 36세), 성경희(승무원·당시 23세), 정경숙(승무원·당시 23세), 김봉주(MBC 카메라맨·당시 27세), 임철수(당시 49세), 장기영(국민운동 경기지부장·당시 42세), 채헌덕(자혜병원 원장·당시 37세), 황원(MBC PD·당시 32세), 이동기(강릉합동인쇄소 대표·당시 47세), 최정웅(한국슬레이트 강릉지점·당시 29세) 등 총 11명은 끝내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2살 때 아버지 황원씨와 헤어진 아들 황인철씨는 "대합실에서 다같이 송환자 명단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버지 이름이 없었다. 나중에 돌아오지 못한 11인 이름에 아버지가 있으니 할머니랑 어머니가 기절하셨다. 마음이 갈래갈래 찢어졌다"고 했다.

돌아오지 못한 11명/사진=채널A '이제만나러갑니다' 갈무리

송환자들은 납북 당시 상황에 대한 얘기를 털어놨다. 당시 조창희를 제외한 승객 46명과 승무원 4명 등 총 50명은 대합실에서 추위에 떨다가 며칠 후 새벽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평양 여관과 대동강 여관에 분산 수용된 후 약 두 달 동안 우상화 교육을 받았다. 고강도 전기고문에 약물 주사까지 자행했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공무원이었던 한 송환자는 "돌아오지 못한 11명도 저희하고 같이 쭉 지내다가 며칠 있다가 한사람 없어지고 또 며칠 있다가 한사람 없어졌다. 그런 식으로 돌아올 때까지 11명이 저희들도 모르게 중간중간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39명뿐이었다"고 했다. 북한이 11명만 골라서 억류시킨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또 이 송환자는 "북한 측에 공무원이라고 직업을 밝힐 수 없어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뭘 파는지 써보라고 하더라. 한 300종류 가까이 써서 제출했는데, 2~3일 후 또 써보라고 했다"며 "하나도 안 틀리고 복사한 것처럼 그대로 썼다"고 당시 아찔했던 상황을 전하기도 했다.

32년 만에 재회한 모녀…오열한 승무원 성경희

32년 만에 재회한 모녀. 어머니 이덕후씨(왼), 승무원 성경희씨(오)/사진=KBS 갈무리2001년 2월 금강산에서 3차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면서 32년 만에 미 송환자의 생사를 알 수 있었다. 당시 억류됐었던 승무원 성경희씨가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나와 어머니 이후덕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20대였던 딸이 50대가 되어 나타나자 이씨는 딸을 못 알아봤다. 그러다 성씨가 계속 "엄마, 엄마"라고 부르자 결국 딸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성씨는 아버지의 생사를 물었고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는 진작 돌아가셨지"라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성씨는 함께 납북됐던 승무원 정경숙씨가 평양에 살고 있으며 당시 자신과 자매처럼 지내고 있다고 했다. 또 기장 유병하씨와 부기장 최석만씨가 북한 공군에서 근무하고 있고 특히 최씨는 1남1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는 얘기를 전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오고 싶다고 하더라"

황원씨와 아들 황인철씨/사진=채널A '이제만나러갑니다' 갈무리황원씨 아들 황인철씨는 "송환자 39명이 증언했다. 젋은 언론인이었던 아버지가 국제법에 따라 한국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북한에 요구했다고 하더라. 민간 항공기 납치는 국제 범죄행위이고 전세계가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고 했다. 사상 교육 시간에도 굴하지 않고 비판했다고 하더라"며 "아버지는 국제법에 의해서 보호받을 거란 희망이 있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고 했다.

인철씨는 2006년 적십자사를 통해서 북한 측에 생사 확인을 요청하는 등 아버지와 연락이 닿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북한 답변은 "확인 불가능" 뿐이었다고 한다. 2009년에는 월북 후 탈북한 오길남과 만났다. 오길남으로부터 아버지가 1985년에 대남방송 구국의 소리 방송에서 근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2011년 6월에는 수천명의 북한 주민을 탈북시킨 '슈퍼맨'이라는 인물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신의주에서 200km, 평양에서 100km 떨어진 곳에 살아있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2013년에는 '슈퍼맨'을 통해 북한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서울로 통화 연결을 해 아버지의 목소리를 직접 듣게 됐다. 아버지임을 확인하기 위해 "어릴 때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 있는데 무엇인지 아시냐"고 물었고, 이에 수화기 너머에서는 곧바로 "그때 '지팡이 장'자를 써서, 내가 '인장'이라고 불렀다"는 답이 되돌아왔다. 아버지가 살아있음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인철씨 아버지는 탈북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2013년 북한 3차 핵실험으로 삼엄해진 경비때문에 탈북의 기회가 사라졌다. 여기에 탈출을 실패한 아버지가 격리됐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탈북을 도운 사람들이 모두 처형됐으며 이후 아버지의 생사도 알 수 없어졌다고 한다.

2019년 3월 UN 인권이사회에 참석한 인철씨/사진=SBS '꼬꼬무' 갈무리인철씨는 2019년 3월 UN 인권이사회에 참석해 아버지 송환을 요구하며 울부짖었다. 인철씨는 "50년이 지났다. 이제 아버지를 집으로 데려올 때다. 북한 요원의 대한항공 여객기 공중 납치에 의한 황 씨의 신체적 자유 박탈은 법적 근거나 정당성이 없다. 북한은 아버지를 계속 구금하여 세계인권선언 제9조 및 자유권 규약 9조 1항을 위반했다. 이에 아버지를 조속히 석방할 것이며 완전하고 전면적인 수사를 통해 책임자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다"고 외쳤다.

"사건이 잊혀지는 게 제일 두려워"

가족들은 여전히 납북된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다. 장기영씨 아들 장재석씨는 "반세기가 지나니까 이걸 아는 국민들이 많이 없다고 생각한다. 북한에 납북돼 소식도 모르고, 생사도 모르고 그런 세월을 50년 이상 보냈다. 우리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꼭 한 번 살펴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 부인 이순남씨는 "만나는 건 기적이다. 만나면 보고 싶었다고, 아이들이 이렇게 성장했다고 자랑도 하고 싶고, 못 추는 춤도 추고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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