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일한 지 10년…병원에 처음 갔어요 [6411의 목소리] - Supple

한국서 일한 지 10년…병원에 처음 갔어요 [6411의 목소리]

한국에서 일한 마지막 식품가공 공장에서 필자는 기계를 청소하다가 손이 끼여 눌렸다. 수술을 여러번 했고, 지금도 치료를 받고 있다. 필자 제공

남라타(가명) | 네팔 이주여성노동자

 나는 네팔의 시골에서 태어났어요. 수도 카트만두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에요. 엄마, 아빠, 언니와 남동생이 있어요. 대학에 들어가 교사가 되려고 했지만 너무 가난했어요. 대학을 중퇴했어요. 한국어를 공부하고 건강검진을 통과해서 22살, 2015년 한국에 왔어요. 나는 시골 출신이라 일은 자신 있고 건강했거든요. 나처럼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사람들은 다 젊고 건강해요.

나의 첫 직장은 경남 밀양의 비닐하우스예요. 2년 일했어요. 우리는 채소 같은 거 다, 상추, 고추, 딸기를 땄어요. 밭에 컨테이너를 놓고 처음에 나랑 같이 2명이 살았고, 2명이 더 왔어요. 작은 컨테이너에 작은 샤워기로 4명이 사는 건 좁았어요. 재래식 화장실도 힘들었죠. 밥을 해 먹어야 하는데 시장도 멀고요. 우리는 10시간씩 일했어요. 쪼그리고 일하니까 무릎이 진짜 말 못 하게 아픈 거예요. 한달에 2번 쉬었는데, 사장님이 한번도 못 쉬게 해서 기절할 뻔한 적이 있어요. 비닐하우스 안이 더워서, 좀 많이 더워가지고 아프기 시작했어요. 비닐하우스 안에 선풍기가 없으니까, 땀 많이 흘리고 먹지도 못하고 살이 엄청 빠졌어요. 일하다가 아프면 좀 자고 나와서 일하다가 다시 자고 그러다가 사장님한테 저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했어요. 노동부에 신청하니까 인천에 있는 콩나물 공장으로 보내줬어요.

콩나물 공장은 컸어요. 날마다 10㎏짜리 콩나물을 담아서 들었어요. 하루 일하는 시간 10시간, 쉬는 날 한달에 2번, 비닐하우스에서 일할 때랑 같았어요. 컨테이너 숙소랑 화장실도 비슷했는데 사람이 많아서 더 불편했어요. 10㎏을 계속 들어야 하니까 무거운 걸 들다가 몸이 점점 약해지고 허리를 조금 움직여도 아팠어요. 1년 있다가 다시 옮겼어요. 노동부에서 충청도에 있는 양계장으로 옮겨줬어요. 4명이서 달걀 받고 달걀 포장하고 닭 사료 주고 청소했어요. 콩나물 공장보다 일은 조금 괜찮았는데 양계장 옆 컨테이너에서 자니까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팠어요. 처음에 밀양에서 엄청 많이 아프고 그때부터 몸도 약해졌거든요. 아프면 스트레스받고 머리가 더 아팠어요. 양계장을 그만뒀어요.

그때 고용허가제 4년10개월에서 1년인가, 몇개월만 시간이 남았어요. 불법(체류가) 될까 봐 걱정했는데 친구가 공장을 소개해줬어요. 아르바이트로. 달걀로 여러가지를 만드는 공장인데 후라이, 구이, 오믈렛 여러 가지가 있어요. 기계가 엄청 길게 있고 달걀이 자동으로 떨어져서 구이가 되고, 우리가 구이를 받고, 또 돌아가는 기계예요. 우리가 생산도 하고 포장도 하고 다 하는 거예요. 일하는 사람이 100명 넘을 거예요. 낮에는 한국 아줌마들이 일하고 우리는 야간에 해요. 야간에는 한국 아줌마들이 못 하니까 우리 보고 야간에 해달라고 회사에서 말해요. 저녁 8시 반에 출근하고 아침 8시 반에 퇴근해요. 야간에 일을 하는데, 기계에서 구이를 받다가 부품을 청소하다가 구이를 받다가 부품을 청소하다가 이렇게 기름 걸레로 닦아야 해요.

그렇게 기계를 닦다가 걸레가 걸려서 걸레랑 손이 같이 기계로 들어갔어요. 우리가 한 기계에 2명이 있어야 해요. 나는 이쪽에 있으면 이쪽에 같이 있던 사람이 저기 센서가 있는 데로 뛰어가지고 기계를 꺼야 해요. 기계를 꺼도 손을 제대로 금방 못 빼요. 멀리서 부품을 빼야 해요. 나는 혼자 있었고 기계를 끄고 손을 뺄 때까지 손바닥이 기계에 들어갔어요. 5분인가 지났어요. 손을 빼고 같이 일하는 아줌마가 병원에 데려다줬어요. 야간이에요. 야간에 병원에 갔어요. 회사는 산업재해 신청을 안 하고 일반 치료를 받으라고 했어요. 걱정하지 말라고, 회사가 돈을 내줄 거라고 했어요. 손 수술을 여러번 했어요. 3개월 지나니까 회사가 돈을 안 내준다고 해요. 수술이 남아 있는데. 몇퍼센트도 치료가 안 끝났는데 말이죠. 한국에 사는 네팔 사람이 한국말로 통역해주고 서류를 써줬어요. 산재가 됐어요. 병원에 입원해서 혼자 있을 때 막막했어요. 지금은 일주일에 한번씩 병원에 가요. 비닐하우스에서도 콩나물 공장에서도 양계장에서도 한번도 병원에 가지 않았어요. 손을 다치고 병원에 처음 갔어요. 산재 치료하는 동안 있을 수 있는 비자가 나왔어요. 비자가 끝나면 네팔로 돌아가야죠. 22살에 한국에 온 나는 지금 32살이 되었네요.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가 옮겨 적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삶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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