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최종 승소 사례 '제로'…차량 결함 입증 사실상 불가능
국회서 입증 책임 '소비자→제조사' 제조물 책임법 개정 움직임
도현이 가족 "안전장치 의무화·EDR 기록 시간 연장" 입법 청원
(춘천=연합뉴스) 박영서 기자 = 전국에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와 이로 인한 소송이 잇따르면서 국회에서 제조물 책임법 일부개정법률안 발의가 이어지고 있다.
2022년 12월 강원 강릉시에서 이도현(사망 당시 12세)군이 숨진 사고를 계기로 이른바 '도현이법'이라고도 불리는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의 핵심은 손해배상 소송에서 결함 입증 책임 주체를 '소비자→제조사'로 전환하는 것이다.
도현이 가족은 이에 더해 급발진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인 '가속제압장치' 또는 '비상정지스위치'를 제조사들이 장착하도록 강제하고, 사고기록장치(EDR)의 기록 시간을 늘려 사고 원인을 정확히 규명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국내에서 급발진 의심 사고를 둘러싼 손해배상 소송에서 제조사가 배상 책임을 진 사례는 대법원 확정판결로는 단 한 건도 없는 상황. 제조물 책임법이 어떤 방향으로 개정될지 관심이 쏠린다.
◇ 급발진 의심 사고 속출하는데…설계도면 1장도 받기 힘든 소비자
더불어민주당 허영(춘천·철원·화천·양구갑) 의원이 한국교통안전공단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자동차 리콜센터가 2010년부터 2024년 3월까지 14년간 접수한 급발진 의심 사고는 791건이다.
그러나 이 중 급발진으로 인정된 사례는 단 1건도 없었다.
현행 제조물 책임법은 '제조물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손해가 발생한 사실' 등을 증명하면 제조물에 결함이 있었고, 그 결함으로 인해 손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피해자의 입증 책임을 경감하기 위해 2017년 개정된 것이지만, 현재까지 급발진 의심 사고로 인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제조사가 배상 책임을 진 사례는 하급심 판결 4건 외에 대법원 최종 판결로는 단 1건도 없었다.
소비자가 결함을 입증하려고 해도 설계도면 1장조차 영업비밀을 이유로 제공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까다로운 급발진 추정 요건을 충족하기 어려운 데다 고도의 기술로 제조된 차량에 관한 정보에 접근조차 쉽지 않은 소비자들로서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울 수밖에 없는 구조다.
도현이 가족의 사고를 계기로 지난 21대 국회에서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 5건이 발의됐으나 '입법례가 없으며,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이유로 결국 임기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현 22대 국회에서도 12일 현재까지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 6건이 발의됐다.
이들 법안 모두 고도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제조된 제조물의 경우 일반 소비자가 결함을 입증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따라 결함 입증 책임을 소비자에서 제조사로 전환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또 일반 소비자들이 제조물과 관련된 자료에 접근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해 민사소송법상 문서제출명령보다 강화된 자료 제출명령 내용을 담고 있는 법안도 있다.
영업비밀이라 할지라도 결함 증명과 손해액 산정에 반드시 필요하면 자료 제출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하고, 제출명령 불응 시 해당 자료를 통해 증명하고자 하는 사실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취지다.
즉 제조사가 영업비밀을 이유로 자료 제출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일을 막고, 소비자의 입증 부담을 완화하고 피해구제의 실효성을 높이겠다는 의도다.
◇ 도현이 가족 "소비자가 결함 80∼90% 증명 불가…50%+α로 낮춰야"
국회에서 발의한 개정안이 급발진 사고 발생 이후 소송 시 제도 개선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면, 도현이 가족이 입법 청원한 도현이법은 예방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9만여명이 동의한 도현이법은 안전을 위해 토요타와 테슬라가 장착하고 있는 가속제압장치와 김용은 한국자동차안전연구원 책임연구원이 개발한 비상정지스위치 중 하나를 장착하지 않으면 설계 결함으로 보는 규정을 뒀다.
이들 장치는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뿐만 아니라 운전자의 페달 오조작에 의한 급가속 상황에도 작동이 가능하다.
차량 결함 입증 책임 주체 전환 관련 조항에서는 유럽연합(EU)이 올해 3월 확정한 제조물 책임법 지침 조항(제10조 4항)인 '소비자인 원고가 기술적 또는 과학적 복잡성으로 인해 제품의 결함과 인과관계를 입증하기가 과도하게 어려운 경우 결함과 인과관계를 추정해서 입증 책임을 소비자에서 제조사로 전환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점이 눈에 띈다.
또 EU가 2022년 자동차 안전 규정을 개정해 2024년 7월부터 판매하는 차량에는 주행 데이터를 충돌 전 30초 동안 기록하는 사고기록장치(EDR) 장착을 의무화한 점을 들어 EU에서 제시한 EDR과 같은 EDR을 장착해야 한다는 조항도 담았다.
현재 국내 차량의 EDR은 충돌 전 5초만 기록해 급발진 발생 시점과 진행 과정의 데이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EDR이 기록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신뢰성 있는 분석이 가능해 사고 원인을 더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다.
도현이법은 '증명도 기준' 역시 지금보다 더 완화돼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민사소송에서 법원은 '고도의 개연성 있는 확신'이라는 증명도 기준을 설정해 사실인정을 하고 있다.
이는 80∼90%의 확신, 즉 십중팔구의 확률을 일컫는 것으로, 형사재판에서 검사가 범죄사실을 입증하는 데 적용되는 '합리적 의심이 들 여지가 없는 정도의 증명 기준'인 90%의 확률과 거의 동일한 수준이다.
도현이 가족은 이 같은 기준을 미국의 제조물책임 소송에서의 입증 책임 기준인 '증거의 우세 기준'(50%+α)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증거의 우세 기준을 적용하면 경제력과 기술력에서 열세에 있고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인해 결함을 입증하기 어려운 소비자의 증명 부담이 완화되고, 소비자의 주장이 제조사보다 더 설득력이 있을 때 승소할 수 있다.
도현이 아빠 이상훈씨는 12일 "소비자가 사실상 밝혀내기 불가능한 차량 결함을 증명해야 하는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현행법을 반드시 올해 안에 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도현이 가족이 차량 제조사인 KG모빌리티(이하 KGM·옛 쌍용자동차)를 상대로 이번 사고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7억6천만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 여섯 번째 변론기일이 오는 13일 춘천지법 강릉지원에서 열린다.
[자막뉴스] 강릉 급발진 사고 '사고기록장치', 재감정 결과 신뢰성에 의문[http://yna.kr/AKR20240812053500062]conany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