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국어보다는 수학 잘해야 국어국문과 입학할 수 있다니

"대입 학력고사 때 수학 답안은 모두 1번으로 찍었다"…김미경

"꼴찌서 두번째로 육사 들어갔고, 수학성적 안좋았다"…전인범

"써먹을 데 없을듯한 수학, 왜 배워야 하는지 몰랐다:…김재련

[※ 편집자 주= 이번 특집 기사는 학창 시절 수학을 잘 못했지만, 사회에서 우수한 성과를 보여주는 [삶] 인터뷰이들의 스토리를 발췌해 별도로 소개합니다.]

2008년 강연 중인 김미경
[본인 제공]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한국에서 문과생 홀대가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어는 아주 잘하는데 수학을 못하면 대학교 국문과에 못 들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문과생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취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삶] 인터뷰이들 상당수는 학창시절에 수학을 잘 못 했지만, 사회에 나와서는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만들어냈다.

군대, 법조계, 강연, 역사, 문학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수리 능력이 약해도 공감 능력, 상황 파악 능력, 추진 능력, 집중력, 판단력 등에서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문과생이라는 이유로, 수학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대학 입학과 취업 등에서 심하게 홀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생산성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잠재적 인재들의 성장 가능성을 학창 시절 단계에서 꺾어놓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아래 질문-답변은 2022년 9월에 시작한 [삶] 인터뷰의 그동안 송고 내용 가운데 학창시절 수학과 관련한 부문만 별도로 발췌해 묶은 것이다. ※ 표시는 기사 작성자인 윤근영 기자의 평가와 느낌을 적은 것이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스타강사 김미경
[연합뉴스 사진]
고교 시절 가족과 함께 한 김미경(왼쪽에서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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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강사 김미경

-- 초중고 시절 성적은 어떠했나.

▲ 반에서 중상(中上) 정도였고, 상위 10∼20%에 들어갔다. 어릴 때부터 말을 잘해서 줄곧 반장을 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수학 공부를 하지 않았다. 2차 방정식이 나오면서 수학을 포기한 것이다. 고교 3학년 때 치른 대입 학력고사(현재의 수능)에서 수학 시험을 볼 때는 모든 문제의 1번 답안을 정답으로 찍었다. 모두 5분 걸렸고, 남은 시간은 잤다. 연세대 작곡과에 수석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수학 외에 영어, 국어, 역사 등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 한국 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 학생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천재성 5개씩을 갖고 있다고 본다. 우리 교육은 이 천재성을 무시하고 종합점수로 서열을 매긴다는 데 있다. 일정 수준의 평균적인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개개인이 꿈을 키울 수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10년, 20년 몰입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게 진정한 교육이다.

※ 김미경은 연세대 작곡과를 졸업한 후에는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다 전문 강연자로 직업을 바꿨다. 적성에 딱 맞는 일이었다. 그는 집중력도 강해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냈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수학에서는 손을 뗐지만, 자기 직업 분야에서는 수학을 잘했던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연합뉴스 사진]
육사생도 시절 전인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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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인범 전(前) 특전사령관

-- 중고등학교 시절은 어떠했나.

▲ 서울의 금호동에 있는 대경중학교를 거쳐 경기고에 들어갔다. 그때 경기고는 시험이 아닌 추첨 방식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였다. 나는 고등학교에서도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당시는 외우는 게 많았고, 나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지 않았다.

-- 당시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갈 정도이면 고교 학업성적이 우수했을 듯한데.

▲ 1977년도 370명의 육사 입교생(37기생) 가운데 나는 꼴찌에서 두 번째로 들어갔다. 당시 시험과목은 국어, 영어, 수학, 사회였다. 첫 번째 과목인 국어시험을 볼 때는 눈앞이 캄캄했다. 두 번째 시간은 영어 과목이었는데, 잘하면 100점을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육사 교수들이 100점을 줄 수 없어서 99.9점을 줬다고 한다. 수학 점수도 좋지 않았다.

-- 영어 과목의 점수가 좋아서 다른 과목의 부진을 만회한 것인가.

▲ 그랬던 것 같다. 당시 경기고에서 30∼40명이 육사에 지원했지만 2명만이 합격했다. 당시 우리 고등학교의 한 선생님은 "전인범이 육사에 합격한 것은 사람에게 초지일관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 전인범은 거의 꼴찌 성적으로 육사에 합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어 외에 다른 과목의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수학이 약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그는 육군 소위가 된 이후에 동기생 중 항상 선두그룹에 속했다. 육군 27사단장(소장), 특전사령관(중장)을 지냈는데, 중장까지 오른 사람은 동기생들 가운데 극소수였다. 그가 군(軍) 지휘관으로서 성공적이었던 것은 투철한 군인정신과 국가관, 빠른 판단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부하들을 위할 줄 알았고, 다른 군인들과 소통하는 능력이 남달랐다. 이런 능력은 수학 성적과 상관없었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김재련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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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시험 공부할 때 김재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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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 변호사

-- 초중고 시절은 어떠했나.

▲ 고향에서 사천중학교를 졸업하고 강릉시에 있는 강릉여고로 진학했다. 시골 중학교 시절에는 공부를 아주 잘해서 선생님들로부터 인정받았으나 강릉여고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당시 강릉여고는 비평준화 고교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성적은 중간보다 약간 잘하는 정도였다. 국어와 영어를 잘했는데, 수학은 못 했다. 당시에는 어린 마음에 지수나 로그처럼 써먹을 데 없어 보이는 수학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은 그 시절에 수학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나를 닮아서 수학을 못 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 사법시험에는 금방 합격했나.

▲ 원래는 기자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자가 취재원으로부터 푸대접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성이 주체적으로 일할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고민한 끝에 법조인이 되기로 했다. 그래서 이화여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다닐 때는 놀러 다니고, 연애하느라 제대로 사법시험 준비를 못 했다. 1996년 2월에 졸업하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1998년 1차에 붙었으나 집중하지 못해 실패했다. 2000년에 1차, 2차, 3차에 동시 합격했는데, 독하게 공부했기에 가능했다. 책상 앞에서 일어나지 않기 위해 두 다리를 등산용 수건으로 묶어놓고 공부했다. 하루 24시간 중 21시간을 공부한 적도 있다.

※ 김재련은 학창 시절 수학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변호사로서 활약하고 있으며 성과도 적지 않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집념과 끈기 등이 그런 성과의 토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 공부할 때 자기 다리를 묶어 놓는 학생은 드물다. 이런 강한 집중력은 수학을 잘 못해도 가질 수 있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정호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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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재학시절 어머니와 함께 한 정호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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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정호승

-- 문예 장학생으로 경희대 국어국문과에 들어갔다고 하던데.

▲ 중고교 시절 나의 학업성적은 중간밖에 안 됐다. 수학을 못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등록금을 낼 형편이 아니었다. 장학생이 돼야 대학에 갈 수 있었는데, 경희대에 문예 장학생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1967년 9월 경희대 주최 백일장 시 부문에서 4등을 했다. 3등까지만 장학생이 될 수 있었기에 아쉽게 탈락했다.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11월에 열린 경희대 주최 전국 고교생 문예 작품 현상 모집에 시 대신에 평론을 제출했다. '고교 문예의 성찰- 고교 시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이었다.

-- 고등학생이 평론도 할 줄 알았나.

▲ 고교 시절에 문예잡지 '현대문학'을 헌책으로 사서 열심히 읽었다. 그 속에 있는 평론도 보면서 그 기본적 개념을 이해했다. 나는 경희대 현상 모집에 당선돼 무시험으로 입학했다.

-- 군 복무를 하면서 신춘문예에 당선됐나.

▲ 대학에 입학한 지 1년 만에 군대에 갔다. 문예 장학생은 1년만 가능했고 신춘문예에 당선돼야 장학생 신분을 지속할 수 있었다. 군대에 가서 열심히 시를 썼다. 무기고 앞에서 보초를 서면서 시를 쓰기도 했다. 1972년 한국일보에 동시, 1973년 대한일보에 시가 당선됐다.

※ 정호승 시인이 일반 전형으로 경희대 국문과에 지원했다면 입학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학을 못 했기 때문이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많은 학생이 그동안 국문학과 입학 단계에서 좌절을 겪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수학을 못 한다는 이유로 손흥민 선수에게 축구를 배울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에 큰 손실이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란코프 교수
[연합뉴스 사진]
1984년 김일성종합대학교 유학 시절 란코프 교수(맨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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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

-- 본인은 1980년 소련(현재 러시아) 레닌그라드 대학교(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중국역사학과에 입학했는데, 이 대학교는 현재 러시아에서 랭킹이 어느 정도인가.

▲ 러시아에서는 한국처럼 대학교 종합 순위가 있지는 않았다. 당시 소련에서는 분야별로, 단과대별로 순위를 매길 뿐이었다. 그때 학생들 인식에 따르면 나의 모교는 종합순위로 랭킹 4위 정도였다. 1∼3위 대학들은 모두 모스크바에 있었다. 오늘날 QS 세계 대학 랭킹을 보면, 나의 모교는 러시아에서 2위다.

-- 1980년대 당시 소련에서도 한국처럼 학력고사(현재 수학능력시험) 같은 것이 있었나.

▲ 대학에 들어가려면 내신 점수와 입학시험 점수가 좋아야 했다. 입학시험은 글쓰기, 러시아 문학, 역사, 외국어 등 4과목인데, 각각 시험을 쳐야 했다.

-- 본인은 공부를 잘했나.

▲ 아주 잘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레닌그라드 대학교와 같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모교에 입학하고 졸업한 것이 내 인생에서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0년제 초중고 통합학교에서 종합적으로 전교 3등 안에 들었다. 학교가 학생들 종합순위를 매기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지만, 내가 주변 친구들 성적을 알기에 내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다. 나는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과외수업을 받기도 했다. 다른 학교의 영어 교사로부터 과외수업을 받았는데, 이건 불법이 아니었다.

-- 현재 한국에서는 수학과 물리학 등이 입시에서 중요한데.

▲ 나는 수학과 물리학 과목을 뛰어나게 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지만 입시에서 이들 과목의 비중이 작아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련에서 이공계가 항상 홀대받은 것은 아니다. 시기에 따라서는 다시 부상하기도 했다.

※ 란코프 교수는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북한 전문가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해서 북한 문제에 대해 자문한 적도 있다. 그는 학창 시절 수학을 잘하지 못했다. 그가 그런 이유로 레닌그라드 대학 입학을 거절당했다면 역사학자이자 북한 전문가로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지 못했을 것이다.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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