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맨슨은 이날 저녁 8시 13분 베이커스필드의 한 병원에서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였다.
맨슨은 히피 문화가 성행하던 1960년대 미국의 사이비 종교 집단 '맨슨 패밀리'를 이끄는 교주였다. 그는 세뇌와 마약을 이용해 추종자들에게 살인을 지시했고, 1969년 1급 살인 7건과 및 살인 공모 1건 등의 혐의로 기소돼 1971년 4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코코란 주립 교도소에 수감됐다.
맨슨은 사망 수년 전부터 건강 악화를 겪고 있었다. 2017년 1월에는 위장 출혈로 입원했다가 3일 만에 교도소로 돌아왔고, 약 10개월 만인 11월 15일 다시 건강이 나빠져 병원에 입원했으나, 4일 만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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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 지시 따른 추종자 4명…임산부 배우·10대 소년 등 5명 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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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슨 패밀리' 4명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에 있던 폴란스키 감독 집에 침입해 그의 아내이자 인기 배우였던 샤론 테이트와 그의 지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당시 폴란스키 감독은 영국 런던 출장 중이라 화를 면했지만, 그의 아내 샤론 테이트와 그의 지인 등 총 5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테이트는 임신 8개월이었으며, 피해자 중에는 10대 소년도 포함돼 충격을 더했다.
맨슨은 사건 전날인 8일 밤 자신의 추종자였던 수잔 앳킨스, 린다 카사비앙, 찰스 텍스 왓슨, 패트리샤 크렌빈켈에게 "최대한 잔혹하게" 집에 있는 사람들을 "완전히 파괴하라"라며 살인을 지시했다.
테이트의 전 연인이자 유명 헤어 디자이너였던 제이 세브링은 임산부였던 테이트를 줄로 묶는 것에 항의하다가 살해됐다. 폴란스키 감독의 친구이자 사교계 명사였던 보이치에흐 프리코프스키와 유명 커피 기업 상속녀였던 아비게일 폴저 커플은 기회를 틈타 앞마당과 수영장으로 도망치려다 잡혀 목숨을 잃었다.
테이트는 "아이를 낳고 싶다"고 빌며 배 속 아이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맨슨 일당은 그를 흉기로 잔혹하게 살해한 뒤 거실에 매달아뒀다. 또한 상징적인 문구를 남기라는 맨슨의 지시에 따라 이들은 테이트의 피로 벽에 'Pig'(돼지)라는 낙서하기도 했다.
이들은 다음날에도 미국 로스앤젤레스 로스 펠리스 지역의 가정집에 침입해 2명을 더 살해하는 등 살인극을 벌이다 붙잡혔다. 이들은 피해자들을 잔혹하게 살해했으며, 피해자들의 피로 벽에 "Rise"(일어나라), "Death to pigs"(돼지들에게 죽음을), "헬터 스켈터"(Helter Skelter) 등의 문구를 썼다.
1970년 맨슨을 포함한 '맨슨 패밀리' 일당은 테이트 살인사건 등 연쇄 살인 혐의로 체포, 기소됐다. 1971년 살인을 지시한 맨슨과 살인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왓슨, 크렌빈켈, 앳킨스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이듬해 사형제가 폐지되면서 종신형으로 감형돼 복역했다.
살인에 직접 가담하지 않고 망을 보는 역할을 했던 카사비앙은 살인 사건에 대한 법정 증언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사법 거래를 받아 기소가 면제돼 풀려났다.
맨슨은 복역 중 2012년까지 12차례 가석방을 요청했지만 매번 거부당했다. 그의 다음 가석방 심리는 2027년이었으나 10년 앞두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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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생 기회 있었지만…범죄 반복하다 '살인 지시' 교주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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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슨은 1934년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매춘부에 알코올 중독자였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폭행·강도 혐의로 징역 5년 형을 받아 친척 집에 맡겨지기도 했다.
10대 초반 술과 담배를 접한 맨슨은 이후 대마초 등 마약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에 맨슨의 어머니는 그를 엄격한 규율의 가톨릭 수도원에 보냈으나, 구타와 체벌을 견디지 못한 맨슨은 그곳을 탈출해 절도를 저지르다 붙잡혔다. 여러 교화 시설을 거치며 갱생의 기회가 여러 차례 주어졌지만, 맨슨은 무장 강도, 절도, 강간 등 강력 범죄를 일으키며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여러 차례 복역 이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맨슨은 히피 문화의 상징이던 지역에서 '맨슨 패밀리'라 불리는 사이비 집단의 교주가 됐다. 자신을 신격화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길러 예수처럼 보이게 했으며, 마약을 복용하며 난교 파티를 벌이는가 하면 거처를 제공 받기 위해 '맨슨 패밀리' 소속 여성에게 매춘을 시키기도 했다.
맨슨은 인종 전쟁 끝에 세계 종말이 올 거라 예언했고 이 전쟁을 영국 그룹 비틀스의 곡에서 따온 '헬터 스켈터'(Helter Skelter)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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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역 중 앨범 발매…추종자와 옥중 결혼 추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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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슨은 음악계에 큰 관심이 있었다. 사이비 교주 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음악계에서 일자리를 구하려 했고, 밴드 비치보이스의 데니스 윌슨 등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그는 복역 중이던 2012년엔 추종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2015년 CNN은 당시 맨슨이 여전히 일주일에 약 35통의 편지를 받고 있으며, 무죄를 주장하는 웹사이트에 복역 중인 맨슨의 음성 메시지가 공개되는가 하면 '좋아요' 7만 개를 받은 SNS(소셜미디어) 페이지도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맨슨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이자 훗날 그에 관한 책을 집필한 빈센트 부글리오시는"맨슨이라는 이름은 악(惡)의 '메타포'(은유)가 됐다"며 "인간 본성의 한 면은 순수 악에 매료된다"고 평했다.
맨슨은 버튼과 옥중 결혼을 위해 허가증을 발급받기도 했으나 결혼은 무산됐다. 버튼은 맨슨 사망 후 방부 처리한 그의 시신을 전시해 큰돈을 벌길 원했으나 자신의 '불멸'을 믿은 맨슨은 이를 원치 않았다. 결국 혼인 허가가 만료돼 결혼하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