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전제조건 없는 대화에 열려 있다”며 공을 다시 북한으로 보냈다. 하지만 북한이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핵 보유 인정’을 내건 만큼 실제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존 외교 문법을 따르지 않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스타일상 김 위원장과 ‘깜짝 회동’할 가능성도 점쳐지지만, 2019년처럼 한국이 참여하는 ‘남·북·미 3자 회동’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백악관 관계자는 30일(현지시각) ‘트럼프 행정부는 핵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도 북한과 대화하는 데 열려 있느냐’는 언론 질의에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과 어떤 전제조건 없이 대화하는 것에 여전히 열려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지난 21일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만약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고 현실을 인정한 데 기초하여 우리와 진정한 평화공존을 바란다면, 우리도 미국과 마주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 것에 대해 미국이 ‘전제조건 없는 대화’로 답한 셈이다.
이달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아펙) 정상회의를 계기로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미국이 일종의 ‘메시지 관리’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는 “북한이 비핵화 불가 입장을 절대 고수하는 상황에서 북한을 대화 무대로 유인하려는 메시지로 보인다”며 “비핵화를 전제로 한 협상보다는 만남과 대화 재개에 중점을 두겠다는 의도로, 현실적인 접근”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만나더라도 정식 회담이 아닌 2019년과 같은 ‘깜짝 만남’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6월28~29일 일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직후 트위터를 통해 김 위원장에게 “잠깐 만나자”고 제안했고, 30일 판문점에서 회동이 성사됐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비핵화에 대한 북-미 간 간극이 크지만, 그걸 인정하고 대화에 나선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황은 6년 전과 달리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먼저 북한을 둘러싼 대외 환경이 그때와 상당히 다르다. 북한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와 군사협력을 심화했고, 중국과의 전략적 연대도 강화하고 있다. 2019년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에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9월 중국 전승절을 계기로 북·중·러 3국 전선이 공고해진 지금, 북한은 급할 게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지난 29일 기자간담회에서 아펙 계기 북·미 정상 만남 가능성에 대해 “냉정하게 보면 북한의 태도에서 변화를 느낄 수 없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런 배경이 깔렸다.
특히 김 위원장은 남북관계 개선에는 뜻이 없음을 연일 강조하고 있어, 한국이 북·미 사이를 파고들 공간이 좁다. 이재명 대통령이 8월25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평화를 만드는 피스메이커가 되면, 저는 페이스메이커가 되겠다”고 했지만, 뛸 수 있는 공간이 좁은 상황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의 핵 고도화 수준뿐 아니라 전략적 태도 자체가 바뀌었다. 북한이 미국이 부른다고 덥석 만날 가능성은 없고, 한국이 거기에 개입하는 데 대해선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라고 짚었다. 설사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진다고 해도 2019년 판문점 회동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합류한 것과 같은 ‘3자 회동’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내다본 것이다.
서영지 기자 yj@hani.co.kr